세부 일정

 

325()

09:00 ~

원광대학교

동문주차장 출발

 

 

12:00 ~

의정부 도착, 점심식사

잠실감자탕

031-875-1314

14:00 ~ 16:00

DMZ 1차 탐방

철원 평화전망대, 월정리역 등

 

16:00 ~ 17:00

국경선평화학교 안내 및 통일 강의

정지석 교장

 

17:00 ~ 18:00

DMZ 2차 탐방

조선로동당, 철원군당사, 백마고지역 등

 

18:00 ~ 19:00

저녁식사

바베규

 

19:00 ~ 21:00

민통선 마을주민들과의 대화 및 평화 강의

이재봉 대표

 

21:00 ~ 23:00

자유시간

 

 

326()

08:00 ~ 09:00

아침식사

 

 

09:00 ~ 11:00

소이산 등정

전망대에서 철원평야와 북녘땅 조망

 

11:00 ~ 12:00

한탄강 둘레길

고석정, 승일교 등

 

12:00 ~ 13:00

점심식사

 

 

13:00 ~

철원 출발

 

 

 

철원 평화전망대

평화 전망대는 인근의 철의 삼각전망대 앞으로 나무들이 우거지면서 제 기능을 잃어 2007년 준공되었다. 강원도 철원군 중부전선의 비무장지대와 북한 지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제2땅굴과 군 막사, 검문소를 재현한 전시물과 비무장지대 사진 등이 갖춰져 있으며, 50인승 규모의 모노레일이 설치돼 관광객들이 쉽게 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 태봉국의 옛성터와 철원 평야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쌍안경을 통해 북한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http://korean.visitkorea.or.kr)

 

 

월정리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에 있는 기차역이다.

서울에서 원산까지 이어졌던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신탄리역 다음 역으로, 남방한계선에 근접한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폐역 상태다. 6·25전쟁 당시 월정리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잔해 일부분과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숴진 인민군의 화물열차 골격이 보존되어 있다. 그 앞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현재의 역사건물은 철원안보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복원된 것이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에 위치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月井里驛 (두산백과)]

철원군에서는 군과 협조해 월정리역(철의 삼각전망대), 2땅굴, 철원 노동당사를 관광하는 안보관광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역의 이름은 역 개업 당시의 주소인 어운동면 월정리에 유래하며, 원래 역 구내의 반 정도는 비무장지대 내부에 위치한다. 현재 남아있는 역사와 부속 시설 일체는 한국 전쟁 당시 소실된 건물을 현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한 것이다. 아울러 역 구내는 이웃 철원역과 마찬가지로 보전관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 전쟁 당시에 탈선한 열차의 잔해와 4001호 디젤 기관차가 역 구내에 유치되어 있다.[위키백과]

 

북한노동당사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官田里)에 있는 옛 조선노동당의 철원군 당사 건물이다. 2002531일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기획재정부 소유이며 철원군수가 관리한다.

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1,850의 면적에 지상 3층의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현재 1층은 각방 구조가 남아 있으나, 2층은 3층이 내려앉는 바람에 허물어져 골조만 남아 있다.

1층 구조를 보면 몇 개의 방은 공간이 매우 협소해 1~2명이 사용하였거나 취조실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1개 리()당 쌀 200가마씩 거두었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강제 모금과 노동력 동원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내부 작업은 비밀유지를 위해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참상을 알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하였으며, KBS 열린음악회가 녹화되기도 하였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3-2번지 외 4필지에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鐵原勞動黨舍]

분단된 남·북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건물에서 남과 북으로 분단된 현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철원지역은 해방 후 북한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는데 그때 지어진 노동당 철원군 당사 건물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고 지금은 건물 외벽만이 보존되고 있다. 외벽의 포탄흔적은 한국전쟁 때의 상처이다.

골조에 나 있는 창의 형태를 보면 이 건물은 원래 3층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1층만 방이 남아 있고, 2·3층은 무너져 버려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1층의 방은 밖에서 볼 때와 달리 크기가 작은데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 궁금하다. 해방 후 외국에서 활동하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귀국을 하면서 좌·우의 노선 경쟁이 치열해지고, 남쪽에는 미국이, 북쪽에는 소련이 진주하게 되니, 그 갈등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전쟁이라는 비극을 낳는다. 철원 노동당사가 사용된 기간은 해방 후에서 한국전쟁까지의 시기라 하겠다.

1개 리당 쌀 200가마씩을 거두어들여 이 건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건물의 보안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 이외에는 건축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가 있었다. 바로 9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 때문인데 그들의 노래인 발해를 꿈꾸며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마로니에북스)

 

 

백마고지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에 있는 경원선 철도역.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한는 철도역이며 2007년에 착공되어 20121120일 개장되었다. 역 승강장의 구조는 11선으로 단선으로 이루어진 역이다. 역사 앞으로 3번 국도가 지나며 주변에는 농경지가 대부분으로 이용객이 많지 않다. 백마고지역은 현재 경원선의 종착역이자 출발역이지만 백마고지역에서 북쪽으로 철로를 연장하여 철원역과 월정리역이 개설될 예정이며, 201711월에 완공을 앞두고 있다. 백마고지역은 한국전쟁 중 철원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며 당시 치열했던 공방전을 기념하기 위해 역이름으로 명명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북한군과 중공군 약 1만 명, 국군과 연합군 약 3,500명이 전사하였다. 백마고지역 주변에 백마고지 기념탑이 있으며 철원 노동당사도 인근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白馬高地驛]

 

소이산

"철원군 철원읍에 위치한 소이산은 해발 362m의 낮은 산이다. 고도는 높지 않아도 소이산 정상에 서면 백마고지, 철원역, 2땅굴, 노동당사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난 60여년 간 민간 통행이 금지되었던 군사지역으로 곳곳에 군사시설을 볼 수 있다. 해발고도가 낮기 때문에 정상까지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으면서도 정상에서의 전망이 빼어난 곳이다. 전쟁이후에 지뢰지대가 설치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약 60여 년 간의 민간인 출입통제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생태계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이라는 타이틀은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뢰지대가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표시가 되어있는 곳으로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2012년에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 조성되었다.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은 지뢰꽃길, 생태숲길, 봉수대 오름길로 나뉘어 있으며 정상까지 가려면 봉수대 오름길을 지나야 한다. (출처 : 강원도청)"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텃밭이 딸린 집터를 60년쯤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흙먼지 날리던 학교 운동장은 그 기간 동안 어떻게 바뀔까.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에 가면 그 해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화한 뒤 군사목적으로 매설한 지뢰가 사람의 간섭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201167일 사요리 산 1번지가 주소인 소이산(해발 362m)을 찾았다. 북한이 1946년 지은 3층짜리 건물인 노동당사 건너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이다. 산을 희게 물들이고 있는 아까시나무 꽃을 따라온 양봉가의 벌통이 널려 있었다. 소이산은 민통선 밖에 있지만 주요한 군사시설이 많아 출입이 통제되어 왔다. 전쟁으로 교란된 읍내 야산이 반세기 동안 스스로 변화해 온 모습이 간직돼 있다. 해발 362m의 낮은 산이지만 철원평야의 조망점이다.

일제 때 사방림과 연료림으로 많이 심은 아까시나무가 아직도 숲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길가에 무리지어 돋아난 외래종이자 생태교란종인 단풍잎돼지풀은 이곳에 오랫동안 군사기지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동행한 마상규 박사(한국산림기술인협회 회장)이곳은 외래종인 아까시나무가 향토수종에 앞서 황폐한 땅을 선점한 이후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나갈지를 생태사회학적으로 연구할 최적지라고 말했다.

산 중턱 이후부터는 아까시나무가 줄고 생강나무, 갈참나무, 때죽나무 등 토종 나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대로 놔두면 아까시나무가 산을 점령할 것이란 우려는 근거가 없음이 드러난다. 소이산 정상에 오르자 눈앞이 확 틔었다. 주변과 표고차가 200m 밖에 안 되지만 1,000m급 고산에 오른 느낌이 들었다. 널찍한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그리고 그 건너 북한의 평강고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산이 없었다면 전쟁 때 철원평야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라는 김준락 육군 제6보병사단 공보참모의 설명이 실감 났다. 소이산은 철원평야 논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이다. 철원평야를 한눈에 굽어보는 가치 때문에 이곳엔 고려 때부터 봉수대가 설치돼 함경도 경흥에서 서울로 연결되던 경흥선 봉수로에 속해 있었다.

사요리는 옛 철원읍의 중심지로 농축산물이 모이고 경원선과 금강산 전철이 다녀 관광객이 북적이던 곳이었다. <철원군지>에 실린 1930년 소이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산밑에까지 크고 작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김철암 철원문화원 사무국장은 해방 때 철원읍 인구는 8만이었고 은행 2개와 여고, 도립병원도 있었는데 현재 철원읍 인구는 그 절반 가까운 47,000명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농산물검사소 등 과거의 주요 건물은 근대문화유적으로 남았지만 농가와 논밭의 상당수는 습지와 숲으로 바뀌었다. 마상규 박사는 통일이 돼 철원에 평화도시가 조성된다면 소이산은 그 조망점으로서 서울의 남산과 같은 구실을 할 것이라며 평화의 숲이자 도시의 산림공원으로서 보전하고 개발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생명의 숲2006년 소이산을 천년의 숲수상지로 선정한 것도 평화의 숲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서였다.

소이산의 북쪽 산자락은 모두 지뢰지대이다. 노동당사에서 국도 87호선을 따라 대마리로 향하는 길 양쪽은 옛 철원의 시가지였지만 지난 60여 년 동안 지뢰 통제구역으로 묶였다. 그동안 묵논은 습지로, 묵밭과 집터는 숲으로 바뀌었다. 소이산 자락에서 출입영농을 하는 현응기(71)씨는 지뢰지대 안에 고사리와 고라니가 많지만 폭발사고가 나 사람들이 들어가길 꺼린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곳에 대한 생태조사도 이뤄진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소이산의 생태적 가치는 훼손이 심한 산 위보다 산자락의 지뢰지대가 높을 것으로 본다. 도로를 따라 지뢰지대를 보면 아까시나무, 버드나무, 신나무와 함께 마을에서 심어 기르던 호두나무, 뽕나무 등도 눈에 띈다. 마 박사는 지금은 모두 사라진 서울의 평지 숲의 원형이 여기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지뢰지대 안의 숲 모습, 평지여서 과거 논이거나 집터였을 것이다. 소이산 건너편의 지뢰지대는 넓은 초지를 키 큰 포플러와 아까시나무가 둘러싼 모습이 독특하다. 해방 때 2,600여 명의 졸업생을 냈던 철원공립보통학교 터이다. 운동장은 초원이 됐고 귀퉁이는 고랭이, 부들 등이 자라는 습지가 됐다.

온대지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의 간섭이 중단된 채 생태계의 천이와 복원이 이뤄진 곳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러나 이곳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소규모 지뢰지대여서 인접한 도로와 군부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란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쟁의 유물인 지뢰밭이 지킨 숲의 가치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김명진 국립환경과학원 자연평가연구팀장은 최근 민통선 지역인 백암산에서 희귀한 사향노루 서식지가 발견된 것처럼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민통선 인근 지역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생태적 가치가 발견될 잠재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분단 뒤 첫 생태조사로 기대를 모았던 환경부의 비무장지대 생태조사는 지난해 천안함 침몰 이후 중단된 상태이다. 동해부터 서해까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약 2지역을 가리키는 비무장지대(DMZ)는 군사활동과 산불로 인한 교란이 계속되기는 했어도 반세기 이상 사람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된 곳이어서 세계적 주목을 받는 지역이다.

이제까지 철책선 밖에서 망원경 등으로 관찰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200811월 환경부와 각 분야 전문가 20여명은 유엔군사령부의 허가를 받아 비무장지대 안에서의 생태조사를 처음 시작했다. 200811~12월엔 경기도 파주, 연천 등 비무장지대 서부지역의 조사가 이뤄져 독특한 습지생태계를 발견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 11~12월엔 강원도 철원 지역의 조사를 마쳤다. 그러나 스라소니, 표범 등 대형 포유류의 서식 여부로 관심을 모았던 강원도 화천, 양구, 고성 등 동부지역 조사는 천안함 사태 이후 악화한 남북관계로 이뤄지지 못했다.

생태조사뿐 아니라 6·25 60돌을 맞아 15개 언론사가 국방부의 협조로 추진하던 비무장지대 취재계획도 북한이 비무장지대를 대북 심리전장으로 만들려고 한다며 인명피해를 위협하는 바람에 취소됐다. 유제철 환경부 자연정책과장은 여건만 풀리면 비무장지대 언제든지 생태조사를 재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네이버 캐스트]

 

고석정

강원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長興里)에 있는 정자(亭子).

지포리(芝浦里) 버스 정류장에서 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있다. 신라 때 진평왕이 세운 것으로, 석굴암벽(石窟岩壁)에 시문(詩文)을 새겨 풍경을 예찬한 구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고려 충숙왕이 노닐던 곳이라고 하며, 조선 명종 때에는 의적당(義賊黨)의 두목 임꺽정(林巨正)이 고석정 건너편에 돌벽을 높이 쌓고 칩거하면서 조공물(朝貢物)을 탈취하여 빈민을 구제했다고도 한다.

지금의 정자는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1년 철원 유지들이 재건한 것이다. 현재 뱃놀이·낚시터로 알려져 있으며, 부근 일대에 관광시설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석정(孤石亭)은 철원팔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로 꼽힌다. 한탄강 한폭판에 치솟은 10m 높이의 거대한 기암이 천연덕스럽게 우뚝 솟아 있고, 그 양쪽 허벅지쯤으론 옥같이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른다. 여기에 신라 진평왕 때 축조된 정자와 고석바위 주변의 계곡을 통틀어 고석정이라 한다. 기암이 외따로 강심에 잠겨 있는 탓이었을까. 아무리 보아도 장엄할지언정 외롭지는 않아뵈는데 절벽바위 이름을 외로울 자 고석(孤石)이라 했으니 선인들의 자연을 보는 눈썰미가 매섭다. 철원 제일의 경승지이다. 신라 때는 진평왕이, 고려 때는 충숙왕이 찾아와 노닐던 곳이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의적 임꺽정이 활동하고 은거했던 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직탕폭포에서 승일교를 거쳐오는 고석정의 한탄강은 강폭은 넓지 않으나 이 지점에 와서 특히 강물이 깊고 푸르며 굴곡이 심한 천연의 곡선을 이뤄 아름답다. 강폭 양쪽 주변으론 깎아지른 절벽이 산수화처럼 아름답게 서 있고, 옛 정자는 사라졌으나 원래의 자리에 근래 세운 정자가 있다.

지방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고석정은 신라 때 진평왕이, 고려 때는 충숙왕이 찾아와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유명해진 까닭은 조선시대 의적으로 불린 임꺽정(林巨正, ?~1562)의 활동·은거지로 알려지면서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는 고석정에 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이 고장 사람들은 고석정을 꺽정바위로 부르며 고석정의 형상이 마치 임꺽정이 신고 다니던 장군화를 닮았다고 믿고 있어 흥미롭다.

양주(楊州)의 백정 출신 임꺽정은 의기가 있고 뜻이 굳어 일찍이 국정(國政)에 맘을 두었으나 신분이 천민이어서 뜻을 펼 수 없었다. 울분을 삭이지 못하던 임꺽정은 당쟁으로 조정이 어지럽고 사회기강이 혼란스럽던 1559(명종 14)부터 대적당(大賊黨)을 만들어 동지들을 규합하고 두목이 된다.

그로부터 3년 동안, 1562년까지가 임꺽정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다. 황해도 구월산과 서흥·신계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관청이나 토호·양반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함경도와 황해도 방면의 곡물이 조정으로 운반되는 길목에 성을 쌓고 진상품을 약탈, 서민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약탈한 물건을 서울이나 개성 등 다른 지역으로 가지고 가 팔기도 했다.

임꺽정은 관군의 토벌에 거세게 저항하면서 적어도 3년 이상을 버텨낸 놀라운 인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활동영역은 강원도와 개성, 경기도 등지로 확대되었으며, 변장술·사칭술도 뛰어나 관청에 들어가 수령대접을 받은 적도 있다. 임꺽정 일당은 어디서든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민이 되어 관군의 눈을 피해 교묘히 빠져나갔다. 그러니 토벌에 지친 순경사(巡警使)1561년 정월 꺽정의 형 가도치(加都致)를 잡아 꺽정이라 허위 보고하는 사건도 생겼으며, 꺽정을 사칭하는 가짜 임꺽정도 종종 등장하곤 했다.

임꺽정은 점점 나라의 기강을 흔들 만큼 위협적인 인물이 되어갔고, 조정에서는 갖가지 포상을 내걸며 그의 체포를 독려했다. 임꺽정은 15621월 황해도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에게 체포되어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역사는 보는 입장에 따라 임꺽정을 정반대로 평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연려실기술등에서는 임꺽정을 포악한 도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뒷날 민중들 사이에는 의협심 많고 정의로운 전설적인 인물로 전해오는 것이다.

임꺽정이 도적으로 활약하게 된 배경은 조선사회의 경제적인 모순에 있었다. 황무지를 개간하면 지배층이 날름 소유해버리고 민중들은 모두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농사가 잘되는 것도 아니었고 세금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굶주린 민초들은 하나 둘 먹고 살 길을 찾아 제 땅을 버리고 떠나갔다. 그렇게 유랑하다가 도적이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임꺽정은 그런 모순된 사회에서 분출해 나온 민초들의 대변자였고, 그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면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하던 의적이었던 것이다.

 

고석정 중간쯤엔 임꺽정이 몸을 숨기기 위해 드나들었다는 뻥 뚫린 구멍이 있어 사실감을 더해준다. 겉으로 보기엔 한 사람이 겨우 들고 날 수 있는 공간인데, 바위 속으로 들어가면 대여섯 사람은 너끈히 앉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관군에게 쫓기던 임꺽정은 피할 재간이 없게 되면 변화무쌍한 재주를 부려 꺽지라는 물고기로 변신, 강물 속으로 몸을 숨기곤 했다고 한다. 임꺽정의 재주가 비범했음을 전해주는 대목인데, 이 고장 철원사람들은 아직도 임꺽정은 관군에 잡혀 죽은 게 아니라 물고기 꺽지로 변해 깊은 강물로 들어가 영원히 몸을 숨겨버렸다고 믿는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고장 사람들의 꺽정에 대한 신뢰와 전설을 곧이곧대로 믿을 줄 아는 마음이 푸근하기만 하다.

고석정 주변 용암평원에는 고석성(孤石城)터가 있는데 임꺽정이 관군에 대항하기 위해 쌓았던 성터라고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 9-돌베개)

 

승일교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장흥4(長興四里)와 갈말읍(葛末邑) 문혜리(文惠里)를 잇는 다리이다. 2002531일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강원도 소유이며 철원군수가 관리한다.

총 길이 120m, 높이 35m, 너비 8m,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라고도 한다. 1948년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에서 공사를 시작하였다가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 그후 휴전이 성립되어 한국 땅이 되자, 195812월 한국 정부에서 완성하였다. 결과적으로 기초 공사와 교각 공사는 북한이, 상판 공사 및 마무리 공사는 한국이 한 남북합작의 다리인 셈이다.

3개의 교각 위에 아치형을 이루고 있는 다리로, 처음 북한 쪽에서 지을 때에는 구소련의 유럽 공법이 도입되었으나, 뒤에 한국측에서 지을 때에는 그와는 다른 공법으로 완성되었다. 처음의 북한 설계자는 진남포제련소의 굴뚝을 설계한 김명여라고 한다. 콘크리트 다리로서 시공자와 완성자가 다른 까닭에 양쪽의 아치 모양 또한 약간 다른데, 북한 쪽에서 먼저 지은 다리는 둥글고, 한국측에서 지은 것은 둥근 네모 형태를 띠고 있다.

명칭에 대해서는 김일성(金日成) 시절에 만들기 시작해서 이승만(李承晩) 시절에 완성했다고 해서 이승만의 ()’자와 김일성의 ()’자를 따서 지었다는 설과 6·25전쟁 때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던 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박승일(朴昇日) 대령의 이름을 땄다는 설이 있으나, 현재는 후자의 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 4, 갈말읍 문혜리 읍계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鐵原承日橋]

 

승일교 명칭의 유래 : 철원군 지역 주민들 사이에는 김일성이 시작하고 이승만이 끝냈다고 하여 이승만의 '()'자와 김일성의 '()'자를 한자씩 따서 승일교(承日橋)라 했다는 설과 '김일성을 이기자'고 해서 승일교(勝日橋)라고 했다는 설이 전해지나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한국 전쟁 중 큰 공을 세우고 조선인민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박승일(朴昇日, 1920~ ? ) 연대장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승일교(昇日橋)라고 지어졌다는 것이며, 1985년 세워진 승일교 입구의 기념비에도 이를 정설로 소개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 같은 시기에 포로로 끌려간 고근홍 연대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의 근홍교가 있다.

 

일화 : 유홍준이 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에 승일교를 소개한 내용이 있다. 1995년 박승일(朴昇日) 대령의 유족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이 책의 출판사인 창작과 비평사를 상대로 이 책에 대한 출판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였다. 유족은 철원군의 승일교는 박승일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서 '昇日橋'라고 명명되었는데 책에서는 이승만(李承晩)과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에서 유래한 '承日橋'가 맞는 명칭이라고 기술하고 있어 박승일 대령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하였다. 재판부는 출판사가 1 ~ 8판까지의 책을 수거하고 9판부터 해당 부분을 수정하여 출판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여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승일교 건설과정: 일제 패망 직후, 철원군 일원이 소련군정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효 지배 영역에 속하던 1948년 한탄교(漢灘橋)라는 이름으로 착공되었다.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장이었던 김명여의 설계로 러시아식 공법의 아치교로 설계된 이 다리는 동송읍 쪽의 아치교각만 완성된 상태에서 한국 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52년 주한 미군 79공병대와 대한민국 국군 62공병대가 갈말읍 쪽 교각과 보를 완성, 1958년 개통하고 승일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탄강

강원 철원군·평강군, 경기 연천군을 흐르는 강.

길이 136km. 강원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김화 ·철원 ·포천 일부, 연천(漣川)을 지나 연천군 미산면(嵋山面전곡읍(全谷邑)의 경계에서 임진강(臨津江)으로 흘러든다. 화산폭발로 형성된 추가령구조곡의 좁고 긴 골짜기를 지나는데, 유역에는 절벽과 협곡이 발달하여 있다. 남대천(南大川영평천(永平川차탄천(車灘川) 등의 지류가 있으며, 하류인 전곡 부근은 6·25전쟁 때의 격전지이기도 한데 강변이 아름다워 한탄강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한탄강 [漢灘江]   

물의 전설 : 분단의 탄식이 흐르는 한탄강

우리나라 어느 강보다 변화가 많고 풍광이 수려하다. 강원도 평강의 추가령곡에서 발원하여 철원과 연천을 거쳐 전곡에서 임진강과 합류하는 한탄강, 민족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가로질러 흐르기에 이름조차 한탄일까? 그러나 한탄(漢灘)이란 한여울곧 큰 여울을 뜻하는 말이다. 고유어로 불러 주어야 할 이름을 굳이 한역하다 보니 그만 한숨 쉬며 탄식한다는 한탄(恨歎)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한탄강은 우리나라 어느 강보다도 변화무쌍하고 풍광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이 강은 발원지에서 임진강의 합류점까지 현무암으로 된 용암지대를 관류하기 때문에 곳곳에 수직절벽과 협곡이 형성되어 절경을 이룬다.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대개 절경에는 슬픈 전설이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더구나 이 강은 분단의 장벽과 연결됨으로써 더욱 그런 인식을 굳게 한 것 같다.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서 물살이 급한 개울을 여울이라 한다. 한자어로 쓴다면 천탄(淺灘)이 되겠으나 어울리지 않게 고유어 을 섞어 한탄이 되었다. 지명어가 주는 주술성 때문인지 이 강은 오늘에 와서 한민족 비극의 대명사가 된 느낌이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 왜 그와 같은 한자말을 써야 하는지, 그래서 탄식 서린 비극의 강이 되어야 하는지 바로 그 점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한탄강 주변의 지명은 대개 여울이나 시내와 같은, 물과 연관된 이름이 대부분이다. 한탄은 물론 차탄, 신탄, 포천, 회천, 연천, 동두천, 운천 등이 그러한데 이와 같은 거센소리 지명들은 한결같이 슬픈 전설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철저히 폐허가 된 옛 철원벌은 이 슬픈 전설의 증거품이라고나 할까.

 

한탄강 위에 세워진 승일교

콰이강의 다리를 연상케 하는 남북의 합작품이다. 통일이 된 후에는 분단시대의 전설을 대변해 줄 것이다. 괴물처럼 웅크리고 선 옛 노동당사, 격전의 현장이라는 백마고지, 녹슨 열차의 철골만 덩그렇게 남은 월정역사 등등 이들은 한결같이 망각의 피안에 버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한탄강의 협곡 사이로 위태롭게 걸려 있는 승일교(昇日橋)란 다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마치 영화 속 콰이 강의 다리를 연상케 하는, 이 아치형 다리는 광복 직후 김일성 치하에서 시공되어 휴전 직후 이승만 치하에서 완공되었다고 한다. 승일교란 이름은 이 다리를 건설한 박승일(朴承日) 대령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붙인 것인데, 항간에는 이승만과 김일성 이름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남북 합작품 다리로서 둘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 다름아닌 통일의 염원을 담은 또 하나의 전설이라고 할까.

절벽을 타고 다리 밑으로 내려와 멀리서 보면 분명 다리의 구조가 절반을 경계로 하여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남북 분단이 낳은 비극의 산물, 훗날 한반도가 하나가 되었을 때 이 승일교도 지난날의 아픔을 증언하는 유물이 될 것이다.  

한탄강은 곳곳에 수직으로 된 절벽과 협곡이 형성되어 절경을 이루는, 우리나라 어느 강보다 변화무쌍하고 풍광이 수려하기로 이름 있는 강이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광복 직후 김일성 치하에서 시공되었다가 휴전 직후 이승만 치하에서 완공되었다는, 남북 합작의 아치형 다리 승일교(昇日橋)가 남북 분단이 낳은 비극의 산물로 자리잡고 있다.

승일교 부근에 고석정(孤石亭)이란 작은 바위섬이 있다. 몇 그루 소나무를 머리에 이고 강 가운데 우뚝 선 이 바위섬이 한탄강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이 섬을 보기 위해, 신라의 진평왕이 다녀갔으며 고려의 충숙왕도 다녀갔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그 어떤 왕보다도 한 시대의 영웅 임꺽정의 은신처였다는 전설을 마음속에 더 깊이 새기는 듯하다.

 

고석정

이 바위섬이 임꺽정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임꺽정 기념관이라도 들어서야 할 이 자리에 지금은 철의 삼각지전투를 기념하는 전적관이 들어서 있다.

양주 땅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임꺽정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눕힐 정도의 장사였다고 하고, 또 인정이 많고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라고 했다. 의적이라 불리던 그가 재령 땅에서 관군에 붙잡혀 만고의 역적으로 참수 당하기까지 이곳 외돌괴 바위 틈에 자란 소나무 밑동에 밧줄을 걸고 오르내리며 고석정을 농민봉기의 근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임꺽정의 이야기를 두고 어떤 이는 창조되는 전설이라고도 했다. 그의 산채가 있었기에 임꺽정 기념관이라도 세웠어야 할, 그 자리에 6·25 때 철의 삼각지전투를 기념하는 거대한 전적관만이 들어서 있다. 고석정 부근에서 그의 족적을 찾을 수 있는 흔적이라고는 임꺽정 가든이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식당 간판이 고작이다. 그 대신 유엔군 사령관이 명명했다는 철의 삼각지란 군사용어만이 임꺽정 산채를 장식하고 있다.

연천(漣川)이라는 지명의 앞글자 ()’이 눈물 흘린다는 뜻이어서 그럴까. 차탄천이 끝나는 군남면 남계리에 눈물과 관련된 삼형제바위가 있어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옛날 세 아들을 키우던 홀어머니가 아들들을 모두 차탄천 급류에 잃었다고 한다. 아들을 잃은 어미는 매일 이 냇가에 나와 울다가 자신도 세 아들의 뒤를 따르고 만다. 그래서인가 최근 수년간 이 지역에 홍수가 나서 많은 피해를 보았다는 소식이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연천읍 고문리의 재인폭포에 얽힌 이야기도 슬프기는 매한가지다. 재인(才人)이란 재주 부리는 광대를 일컫는다. 옛날 외줄타기를 장기로 하는 어떤 재인이 예쁜 아내와 함께 이 고을에 살았다. 그런데 재인 아내의 미모를 탐낸 이 고을 수령이 재인으로 하여금 폭포 위에서 줄을 타게 하고 그 줄을 끊어 떨어져 죽게 하였다.

재인이 죽은 후 수령은 재인의 아내에게 다가가 욕심을 채우고자 하였으나 그 일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용모 못지않게 행실과 절개도 곧았던 모양이다. 겁탈하러 덤비는 수령의 코를 깨물어 저항하고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만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 폭포에 재인의 한이 서렸다 하여 재인폭포라 이름하고, 그 마을 역시 수령의 코를 깨문 여인이 살았다 하여 코문리즉 고문리(古文里)라 부르게 되었다.

 

 

연천의 재인폭포

이 고을 수령이 재인의 아내를 취하고자 재인으로 하여금 이 폭포에서 줄을 타게 하고 줄을 끊어 그를 죽게했다. 아직도 광대(재인)의 한이 풀리지 않았는지 물빛은 여전히 푸르다.

한탄강이 긴 탄식을 그치고 임진강의 품에 안기는 전곡 쪽으로 나가면 차탄리(車灘里)란 냇가 마을에 이르게 된다. 냇물이 수레바퀴처럼 빙빙 돈다 하여 수레여울곧 차탄리라 부르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 이 고을 원님이 수레를 타고 민정을 살피다가 태봉 앞 넓은 여울에서 수레와 함께 빠져 죽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선정을 베풀던 원님의 덕을 기려 고을 이름조차 차탄리라 불렀다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어떻든 이 고을 주민들은 인정이 많은 탓인지 울기를 잘했던 모양이다. 고을 원님이 순직했을 때도 여울가에 나와 울었고,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고종과 순종이 승하했을 때도 마을 뒷산에 올라 한양을 향하여 목놓아 울었으니 그 산 이름마저 망곡산(望哭山)이라 한다. 지금은 체육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 이 산등성이에 오르면 그 당시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차탄리

냇물이 수레바퀴처럼 빙빙 돈다 하여 수레여울곧 차탄리(車灘里)라 부르는 이 마을은 옛날 이 고을 원님이 수레를 타고 민정을 살피다가 여울에서 수레와 함께 빠져 죽었는데, 선정을 베푼 원님을 기리기 위해 고을 이름을 차탄리라 불렀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인 고종과 순종이 승하했을 때도 사람들이 마을 뒷산에 올라 목놓아 울었다고 하여 산이름도 망곡산(望哭山)이라 한다.

차탄리 북쪽 신탄리(新灘里)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통곡이 있다. 더 이상 달려갈 수 없는 철도 중단점, 이번에는 인간의 울음이 아니라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수레바퀴의 울음이다. 남방한계선 철책 앞, 예로부터 달우물이라 일컫던 월정리역(月井里驛)에도 똑같은 구호가 적혀 있다. 그것은 단순한 철마의 통곡이 아니라 민족의 염원을 대변한 절규일 것이다.

그런데 한탄강 줄기 따라 이어진 그 슬픈 전설도 이제 그만 눈물을 거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최근 금강산 산행길이 열리고 양측 정상이 만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끊어진 철로를 다시 이을 계획까지 마련하고 있으니 철마도 이제 울음을 그치고 힘차게 기적을 토할 준비를 해야겠다. 바야흐로 한탄이란 이름이 찬탄이란 이름으로 뒤바뀌는 계기를 맞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물의 전설, 도서출판 창해)

 

 

 

 

 


Posted by 사용자 익산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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