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명분이 아니라 지배의 방식이다.
장시근 대표
우리는 지금 전쟁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전쟁을 ‘보고만’ 있습니다. 폭격 장면은 뉴스 화면 속에서 반복되지만, 우리의 일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갑니다. 이 무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요.
미국은 이번 이란 공격에 대해 핵 개발 억제, 중동의 안정, 테러 대응이라는 익숙한 명분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이 포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이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분명합니다. 반미 정권을 제거하고 친미 정권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는 가치나 평화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 영향력과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입니다. 전쟁은 정의의 이름으로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권력의 언어로 진행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별다른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전쟁을 체감하는 방식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미국의 공격 이후 국제 유가는 오르고, 우리의 생활비를 압박합니다. 주간 단위로 롤러코스터를 타듯 출렁이는 금융시장은 불안을 키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숫자와 그래프로 소비될 뿐입니다. 누군가에게 전쟁은 삶과 죽음의 문제지만, 우리에게는 간접적인 불편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전쟁을 빠르게 소비하고 잊어버리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전쟁은 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뉴스 중 하나로 흘러갑니다. 그 사이에서 책임은 흐려지고, 질문은 사라집니다. 누가 전쟁을 결정했는가, 왜 반복되는가,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가장 본질적인 물음이 지워지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은 과거와도 다릅니다. 전쟁은 더이상 총과 미사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경제 제재, 에너지 통제, 금융 압박, 정보전이 결합한 복합적인 전쟁입니다. 더 심각한 변화는 전쟁의 방식 자체입니다. 이제 전쟁은 인공지능이 최적의 시나리오를 계산하고, 그 결과에 따라 무기가 발사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 버튼 하나로 공격이 이루어지는 시대입니다.
그 결과, 전쟁에서 가장 중요해야 할 ‘살상에 대한 죄책감’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화면 속 좌표로 처리되고, 인간의 고통은 데이터로 환원됩니다. 책임은 흐려지고, 전쟁은 더욱 쉽게 선택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합니다. 전쟁은 먼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익산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기름값이 오르고 물가가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전쟁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다만 총성이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소한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전쟁의 명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리고 이 전쟁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벌어지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언어를 비판하고, 그 피해가 어떻게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되는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전쟁은 반복됩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이유는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침묵할수록, 우리가 무감각해질수록, 전쟁은 더 쉽게 선택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닙니다. 전쟁을 ‘남의 일’로 두지 않겠다는 태도, 그리고 그 불편한 진실을 끝까지 직시하려는 용기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다음 전쟁도 똑같이 ‘뉴스로만’ 소비하게 될 것입니다.
유럽에서 전해 내려오는 한 반전 격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인은 전쟁을 일으키고, 부자는 무기를 만들고, 서민의 아들은 전쟁에 나가 죽는다. 전쟁이 끝나면 정치인은 서로 악수하고, 부자는 돈을 세고, 서민은 자식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이 오래된 문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전쟁은 명분이 아니라 지배의 방식이다.
장시근 대표
우리는 지금 전쟁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전쟁을 ‘보고만’ 있습니다. 폭격 장면은 뉴스 화면 속에서 반복되지만, 우리의 일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갑니다. 이 무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요.
미국은 이번 이란 공격에 대해 핵 개발 억제, 중동의 안정, 테러 대응이라는 익숙한 명분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이 포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이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분명합니다. 반미 정권을 제거하고 친미 정권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는 가치나 평화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 영향력과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입니다. 전쟁은 정의의 이름으로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권력의 언어로 진행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별다른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전쟁을 체감하는 방식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미국의 공격 이후 국제 유가는 오르고, 우리의 생활비를 압박합니다. 주간 단위로 롤러코스터를 타듯 출렁이는 금융시장은 불안을 키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숫자와 그래프로 소비될 뿐입니다. 누군가에게 전쟁은 삶과 죽음의 문제지만, 우리에게는 간접적인 불편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전쟁을 빠르게 소비하고 잊어버리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전쟁은 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뉴스 중 하나로 흘러갑니다. 그 사이에서 책임은 흐려지고, 질문은 사라집니다. 누가 전쟁을 결정했는가, 왜 반복되는가,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가장 본질적인 물음이 지워지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은 과거와도 다릅니다. 전쟁은 더이상 총과 미사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경제 제재, 에너지 통제, 금융 압박, 정보전이 결합한 복합적인 전쟁입니다. 더 심각한 변화는 전쟁의 방식 자체입니다. 이제 전쟁은 인공지능이 최적의 시나리오를 계산하고, 그 결과에 따라 무기가 발사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 버튼 하나로 공격이 이루어지는 시대입니다.
그 결과, 전쟁에서 가장 중요해야 할 ‘살상에 대한 죄책감’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화면 속 좌표로 처리되고, 인간의 고통은 데이터로 환원됩니다. 책임은 흐려지고, 전쟁은 더욱 쉽게 선택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합니다. 전쟁은 먼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익산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기름값이 오르고 물가가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전쟁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다만 총성이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소한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전쟁의 명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리고 이 전쟁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벌어지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언어를 비판하고, 그 피해가 어떻게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되는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전쟁은 반복됩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이유는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침묵할수록, 우리가 무감각해질수록, 전쟁은 더 쉽게 선택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닙니다. 전쟁을 ‘남의 일’로 두지 않겠다는 태도, 그리고 그 불편한 진실을 끝까지 직시하려는 용기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다음 전쟁도 똑같이 ‘뉴스로만’ 소비하게 될 것입니다.
유럽에서 전해 내려오는 한 반전 격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인은 전쟁을 일으키고, 부자는 무기를 만들고, 서민의 아들은 전쟁에 나가 죽는다. 전쟁이 끝나면 정치인은 서로 악수하고, 부자는 돈을 세고, 서민은 자식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이 오래된 문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