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깊은 곳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
글 이영훈 익산참여연대 지도위원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하루의 끝이 벽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해가 저문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빛이 머물다 방 안에 고였다.”
몇 번이고 되짚으며 글이 주는 맛을 음미했다. 첫 문장부터 빠져들었다고나 할까. 문장이 만들어내는 공간과 상상을 버무리며 나만의 재미를 찾아갔다. 그중 몇 구절을 인용해보았는데 여러분은 어떨지?
첫 소설이라는데 표현과 묘사, 풀어가는 서사에 푹 빠졌던 ‘델리아 오언스’의 장편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다.
참전군인이지만 부상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연금으로 생활하는 술주정꾼에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빠로부터 엄마와 오빠, 언니들 모두 차례로 집을 떠난다. 적막한 습지의 낡은 집에 혼자 남겨진 6살의 카야. 카야의 어린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버림과 고립, 외로움 속에 생존해야 하는 6살 아이의 습지에서의 삶을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사회적 기반이 하나도 없는 조건에서 자연의 일부, 습지생물의 하나?로 살아가게 하는 차별과 버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카야는 “꼬마돼지만 집에 남았어요.”라고 파도를 보고 말했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기본마저 사라져버린 차별과 고립은 가정에서 마을까지 폭력으로 계속되었다. 그러고
보면, 공동체에서의 차별과 관계의 폭력은 지금도 성차별과 가정폭력, 아동학대, 학교폭력과 직장갑질, 태움과 선후배군기잡기, 왕따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시대 ‘카야’는 지금도 주변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도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글을 알려주고 책을 주면서 카야의 성장을 도왔던 연인 테이트. 인종차별을 받으면서도 카야와 물물교환을 통해 생존의 최소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흑인 점핑과 아줌마 메이블. 체이스의 살인범으로 법정에 선 카야를 변호했던 변호사 톰. 등등
이들이 있어 습지생물에서 인간사회로 나와 시도 쓰고, 책도 내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당히 성장하는 카야가 되었다.
누군가의 성장에는 함께 한 누군가가 꼭 있다. 어려운 시절을 지내 온 나에게도 큰 힘이 되어준 이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 하고 있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카야 옆에 선 모습을 상상해 본다.
등장인물 중에 테이트아빠 ‘스커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아들에 대한 존중과 기다림, 앞날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보면서 경쟁사회를 사는 이 시대 아빠들에게도 여유와 존중, 기다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어쩌면 아빠인 나 스스로에 대한 상념이기도 하지만.
소설은 체이스의 죽음과 카야의 성장을 서사로 엮어 풀어가며, 스릴과 재미를 더했다. 서사가 주는 힘도 있지만, 저자의 표현력, 문장으로 풀어낸 묘사가 새롭고 좋았다. 이런저런 소설을 읽었지만 강한 울림을 준 소설로 손가락에 꼽을 만 하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그야말로 픽션의 정점이다.
저 깊은 곳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
글 이영훈 익산참여연대 지도위원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하루의 끝이 벽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해가 저문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빛이 머물다 방 안에 고였다.”
몇 번이고 되짚으며 글이 주는 맛을 음미했다. 첫 문장부터 빠져들었다고나 할까. 문장이 만들어내는 공간과 상상을 버무리며 나만의 재미를 찾아갔다. 그중 몇 구절을 인용해보았는데 여러분은 어떨지?
첫 소설이라는데 표현과 묘사, 풀어가는 서사에 푹 빠졌던 ‘델리아 오언스’의 장편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다.
참전군인이지만 부상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연금으로 생활하는 술주정꾼에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빠로부터 엄마와 오빠, 언니들 모두 차례로 집을 떠난다. 적막한 습지의 낡은 집에 혼자 남겨진 6살의 카야. 카야의 어린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버림과 고립, 외로움 속에 생존해야 하는 6살 아이의 습지에서의 삶을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사회적 기반이 하나도 없는 조건에서 자연의 일부, 습지생물의 하나?로 살아가게 하는 차별과 버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카야는 “꼬마돼지만 집에 남았어요.”라고 파도를 보고 말했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기본마저 사라져버린 차별과 고립은 가정에서 마을까지 폭력으로 계속되었다. 그러고
보면, 공동체에서의 차별과 관계의 폭력은 지금도 성차별과 가정폭력, 아동학대, 학교폭력과 직장갑질, 태움과 선후배군기잡기, 왕따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시대 ‘카야’는 지금도 주변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도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글을 알려주고 책을 주면서 카야의 성장을 도왔던 연인 테이트. 인종차별을 받으면서도 카야와 물물교환을 통해 생존의 최소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흑인 점핑과 아줌마 메이블. 체이스의 살인범으로 법정에 선 카야를 변호했던 변호사 톰. 등등
이들이 있어 습지생물에서 인간사회로 나와 시도 쓰고, 책도 내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당히 성장하는 카야가 되었다.
누군가의 성장에는 함께 한 누군가가 꼭 있다. 어려운 시절을 지내 온 나에게도 큰 힘이 되어준 이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 하고 있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카야 옆에 선 모습을 상상해 본다.
등장인물 중에 테이트아빠 ‘스커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아들에 대한 존중과 기다림, 앞날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보면서 경쟁사회를 사는 이 시대 아빠들에게도 여유와 존중, 기다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어쩌면 아빠인 나 스스로에 대한 상념이기도 하지만.
소설은 체이스의 죽음과 카야의 성장을 서사로 엮어 풀어가며, 스릴과 재미를 더했다. 서사가 주는 힘도 있지만, 저자의 표현력, 문장으로 풀어낸 묘사가 새롭고 좋았다. 이런저런 소설을 읽었지만 강한 울림을 준 소설로 손가락에 꼽을 만 하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그야말로 픽션의 정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