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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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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난을 추앙하라!


권오성 

금마서동협동조합 사무국장


 한때는 글쓰기가 업이었음에도 솔직히 요즘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인터넷을 떠돌며 키득대거나 잠깐 분개할 시간은 있을지언정 팔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책장에 손이 가질 않는다. 어쩌다 책 정보를 얻어 읽고 싶어지면 주문해서 책장에 욱여넣기만 한다. 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주마다 한 권 정도 사서 택배로 받으면 목차를 훑는 것뿐이다. 책을 사지만 읽지 않는 세월이 최근 몇 년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그렇게 “책은 읽는 게 아니라 사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찌 보면 이 기이한 책 사기 습관은 십수 년 전 우연히 접했던 발언에서 시작된 것 같다. 아마도 방송인 김어준의 입에서 나온 걸로 기억한다. 작가를 도와주는 건 읽는 게 아니라 그 책을 사는 것이라고. 절반 이상은 틀린 말이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어쨌든!


 그랬던 그가 얼마 전 진행하는 인터넷 뉴스 방송에서 출연자와 지루하게 논쟁하는 걸 듣고 관심 두게 된 책이 지금 얘기할 ‘일인칭 가난’(안온)이다. 얇디얇은 책은 늘 그랬듯 곧장 먼지 쌓인 책장으로 들어갈 터였다. 그런데 열대야 때문에 유난히도 잠을 설친 어느 새벽에 수면용으로 집어 들었다가 단숨에 끝까지 읽어버렸다.


 ‘부자’를 추앙하고 소비하지만 ‘가난’을 입에 올리는 게 창피한 시대에서 이십대 작가의 글은 상당한 흡인력을 가졌다. 출중한 글쓰기 능력은 별개로 치고, 작가 본인의 가난을 덤덤하지만 섬세하게 드러내는 걸 순식간에 공감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젊은 날의 기억을 떠올려서였을까, 글쓴이의 힘들었을 시간을 동정한 것이었을까? 허나 내 사고의 한계는 어떻게든 부인하고 싶어도 자연의 섭리상 세대와 성(젠더)에서 벗어날 순 없겠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더위 속 갑작스러운 독서력은 나를 포함한 주변의 다양한 ‘가난한’ 존재 앞에서 조력자이기는커녕 ‘개(같은 아)저씨’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자의식의 발현이었다. 공감 능력보다는 ‘꼰대력’으로 세상을 다 산 것처럼 모두를 가르치려 들고, 지금의 험난한 세상을 만드는 데 분명 일조했음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그런 ‘부류’ 말이다. 앞선 세대의 등골을 휘게 한 것도 모자라 젊은이들의 목에 빨대를 꽂고 있지 않는지 되돌아봐야 할 ‘족속’이다. 하지만 그런 자성 능력이 있었다면 이미 그런 ‘부류’와 ‘족속’이 되었을 리 만무하다.


 곁가지 이야기를 하자면, 최고의 인생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살만하지만 고민이 많은 전문직 아저씨는 가난하고 젊은 여자 인턴 ‘이지안’에게 살갑고 다정한 인생의 조력자로 곁에 서 있다. 이들은 세대를 초월하는 로맨스나 연정이 아니라 쓰디쓴 현실에 저당 잡힌 일상에서 인생의 동지애로 교감한다. 2세대 대표 걸그룹 레인보우 출신의 ‘노을’이라는 분은 계약 종료 후 통장에 돈이 없어 드라마 속 ‘이지안’에 자신을 투영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화려한 연예인 출신의 젊고 성실한 이들도 자칫 극단의 선택을 고민하게 하는 험난한 진짜 우리 사회를 새삼 느끼게 하는 단면이다.


 다시 돌아가서 이 작은 책은 머릿속에서 잔잔한 물음표의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산적한 사회 문제 속에서 현생의 나를 지탱하는 건 무엇인가, 거대한 정치 경제 담론과 비루한 개인 실존 사이에서 만나는 접점은 어디인가, 정치의 효능감과 미래의 가능성이 곤두박질하는 시대에서 믿을 건 과연 무엇인가, 비관론과 냉소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근거 없는 장미빛 희망을 대체할 화두는 무엇일까?’ 하여간 이 뜬금없는 물음표의 파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온라인 속 화려한 개인사를 드러내는 각종 사회관계망은 정보 유통의 공간이라기보다 자기 과시의 전시장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물심양면으로 부자(이어야만 하는)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야 본인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믿는다. 평범한 삶을 사는 상당수는 드러내기보다 자신만의 공간으로 침잠하고 고립되어 버린다. ‘은둔형 외톨이’의 증가와 고독사의 이면에는 명품과 외제차 속에서 부유하는 결코 지속 불가능한 욕망의 결정체가 있다.


 물론 가난이 주는 무력감, 불안감, 공포감은 제 영혼을 갉아먹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평균 소득을 비교하고 그 숫자가 높아지는 게 아니다. 경제 성장에 따른 기초 임금의 증가 못지않게 자신을 만족시키는 기본 삶의 질을 판단할 자의식을 갖는 것이다. 결코 정신 승리나 자기 위안으로 대충 수습하자는 게 아니다. 가난에 결코 주눅 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삶의 영원한 동반자라고 여기면 좋겠다는 말이다. 국가의 도움이 필요한 ‘절대 빈곤’과 소득 통계치의 하위 구간에 해당하는 ‘상대 가난’을 동일시할 이유도 없다.


 후기 자본주의의 사회 구조 문제로 가난의 귀책 사유를 지적하는 이들에게는 천진하고 낭만 있는 말로 치부하겠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한껏 여유를 갖고 자기 삶에 ‘긍정’ 한 숫가락 얹어 본다면 새로운 시야가 생긴다. 절대 빈곤 속에 삶의 한 자락을 놓고 싶은 이들도 분명히 있을 테지만, 또한 국가가 어서 빨리 전국민 기본 소득으로 극단의 선택을 줄여야 한다고 여전히 믿고 있지만서도 어딘가 숨죽여 지쳐 있을 ‘이지안’에게 건네는 혹 해서 하는 뻔하지만 진심 담긴 몇 마디. 너무 고립된 공간에 머물지 말고 한 번쯤 주변 이웃과 한바탕 어울려 보시길,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어려운 우리끼리 함께 나누어 보시길,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간신히 내민 당신 손을 잡아줄 ‘아저씨’가 주변엔 생각보다 훨씬 많다고 믿어 보시길!

이미지출처 : imjina


- 이글은 익산참여연대 소식지 참여와자치 105호 칼럼글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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